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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천구암함의재종중
글쓴이 :  날짜 : 2012.07.23 14:59:30 조회 : 3671 추천 : 0 글쓴이IP : 211.212.4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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涵 義 齋 公 (崔 瓘)

함의재선생의 휘는 관()이고 자는 화서(화서) 호는 함의재(함의재)로 숙종43(병신1716)에 극히 간구하고 담백한 예를 갖춘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또한, 공의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함에도 어릴 적부터 학문에심취하고 사례(사례)에 의거 예의범절이 깍듯하고 어른들을 공경함에 소흘함이 없었으니 주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받았다.

공은 조선조 중엽 퇴계선생과 이정선생(號 龜岩)의 학덕을 깊이 연모하고 두 선생의 현기론과 사례로부터 심덕을 전수받은 연유로 인근일대에서는 평판이 높은 유학자로서 함의제 최선생이라 불리어졌고사례요의란 일편을 편술하셨는데 사례가 길흉상변(吉凶相變)요점과 예학을 근본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 및 동현논설(東賢論說)의 절목의 요점을 나누어 합쳐 한편의사례요의로 집성한 것인데 지금은 유문과 함께 소실되어 애석불금할 따름이며, 최근 새로 발간된 사천시사(泗川市史)에는함의재실은 조선조 말엽 최관선생의 강학지소라고 소개되고 있다.

공의 배위는 동성이씨이며 이구암선생(휘 이정)의 육대손서이시다.

퇴계선생과 이정선생은 호형호제를 나누는 학문적 동지이고, 숙종 때 사액받은 서원이 구계서원이며 대관대라는 곳이다.(현 사천귀암소재)퇴계선생은 구계서원에 오셔서 종종 오래 머무시면서 이정선생과 친구의 정을 돈독히 나누셨는데 함의재공은 그런 사유로 구계서원을 계승발전시키고자 무던히도 애쓰셨고 고종 5년에 서원이 철폐된 후 복원될 때에는 공의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많은 재물과 열과 성을 바쳐 재건하였다.공은 또한 사천귀암의 삭녕최씨의 입향조(入鄕祖)이시며 서부경남에서는 사천최씨의 대명사로 알려질 정도였다.

공의 입구암 이후로 자손의 번창함이 날로 더해서 실로 사천에서는 구전속담에동으로 가도 삭녕최씨, 서로가도 삭녕최씨 판이다라고 진담반 농담반으로 화제가 되었있음은 자손많고 인물많다는 애기로 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공은 사후에 학문실행과 고매한 윤도(倫道)의 사상이 높았다하여 1912년 구계서원을 중건할 때 공을 기리기 위해 당대의 거유(巨儒)이신 정만조(鄭萬朝: 가선대부 규장각 제학) 선생께서함의재공을 이정선생과 함께 배향함이 관련유생과 문하생들을 위하고 여론에 부응할 것이며 공도 함께 배향함이 가하다고 인지하고 구계서원 중건 추배기실비 비문을 남겨주셨다.

작금도 봄철에 사천귀암의 대관대 구계서원에서는 이정선생과 함의재공의 제향을 전액 사천시 문화재국 예산지원으로 성대하게 올리고 있다.

공의 묘소는 고성군 상리 신촌리 산 88 (옛지명 고성군 상리면 가금리 도독산 정상)

지금은 땜 공사로 인하여 수몰지역으로 도독산 아래마을 사천시정동면 소곡리 마을이 수몰지역으로 선정

됨에 따라 도독산 아래자락에 위치한 함의재공의 재실도 수몰지역에 선정되어 옛자태를 영원히

볼수없고 폐허만이 옛자태를 숨기고 있다


















함의재선생묘갈명병서
부군의 휘는 관()이요 자는 화서(和瑞)요 함의제(涵義齋)는 호이다.우리최씨의 본은 삭녕으로 고려 평장사를 역임하신 휘 천노(天老)는 시조이다.조선조에 들어와 대사간을 역임한 휘 복린(卜麟)께서 진주로 낙향하시어 휘 도원(道源)을 생하시니 음사로 지평을 거쳐 세 고을이 수령을 역임하셨다.휘 정()은 충순위에 역임하시고 사천으로 이사 하셨다.휘 두남(斗南)은 임진왜란을 맞아 풍정 숲 피난중 왜구의 진영(나루)에 붙잡혀 밤에 술에 취해자는 적의 칼을 빼앗어 적 두목과 수명을 베고 돌아온(탈출)열세살 어린 참봉공의 충효가 극진함에 널리 알려졌으며 장악원 첨정과 중추부 첨지사에 증직하였으니 공의 고조이시다.증조의 휘는 형립(亨立)이요 조부의 휘는 학()이요 고의 휘는 의겸(義謙)이며 비는 무송윤씨(茂松尹氏)이니 사인 동형(東衡)의 따님이시다. 공께서 숙종 병술년에 구암리 사저에서 태어나시니 품자가 온화하고 재주와 기량이 뛰어나 어린나이에 능히 소학 대학을 암송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가정형편이 극히간구함에도 맛있는 음식이 곁에 떨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온유한 빛이 항상 회모에 나타났다 두 번이나 상을 당하여서도 관을 마련하였으며 대통에 못이겨 얼굴빛이 창백함에도 三일장의 예를 다 하였으며 三개월 간을 한결같이 시묘에 게을리 아니하였으며 三년 간을 비바람을 가리지 아니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하고 애통애 하였다.속세를 떠나 은둔하면서 행실이 의로우니 동민이 말 하기를 심의재(深義齋)는 이르되 함의(涵義)의 뜻이니 안으로 수양을 돈독히 하여 밖으로 모범에 이르고 경서에 마음이 잠겨 의리를 함양하니 일찍이 말 하기를 군자의 행로는 이미 스스로 정도가 있는 바 어찌 구차함을 하겠는가?그 근원은 모두 도산(陶山)선생과 구계(龜溪)선생으로부터 심범을 전수받은 연유라 하겠다. 경향간에 공경하는 법식이 공자의 문학을 배운 선비가 많이 그 문하에서 나온고로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러 말 하기를 함의재선생이라 하였다.영조 임오년에 졸 하시니 향년이 五七세였다.공의재실이 이미 진몰하고 또한 전해 내려오는 유문이 모두 불에타 없어졌으니 통석할 뿐이다. 고성군 도독산부손에 유택을모셨다. 배위 사천이씨(泗川李氏)는 구암선생의 오대손이고 광복(光復)의 따님으로 사남을 낳으셨으니 장남 치문(致文)은 백부에 출계하고 차남 치덕(致德)은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으며 호는 이망헌(二罔軒)이요 三남은 致삼(致삼)이요 四남은 치수(致需)로 중추부첨지사요 나머지 치로(致露)이하는 너무 많아서 모두 기록하지 못하노라.경신년에 이미그 재실을 수리하고 이어서 비석을 세우니 어찌 감히 명문이 없으리오. 명문에 이르기를 평장공의 옛 가문은 간언을 맡아 다 하였고 오직 효와 의로 군자의 관계를 중히 여겼다. 스승이 있어 도를 닦으니 도산과 구계선생이요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 말을 하니 어찌 비가 없겠는가 후손은 이에 밝히고 이에 새겼노라

五대손 가선대부 행장례원전사 형민근찬

이 비문은 옛날 경신년 가을에 전사부군이 지으신봐 비석은 이미 갖추었으나 세우지 못하고 十五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렀다. 무진년에 선비들의 의논이 있어 구계서원을 중건하고 신미년에 이르러 역사를 마치고 거듭 오늘에야 함의재선생부군을 배향하다.소자 대를넘겨 간략하게 전말을 서술하니 후세에 상고하길 바라노라.

六대손 전통훈대부중추원참의 연국은 삼가 기록하고 아울러 썻노라.

공몰후 一七二년 갑술추 八월 일 세움



                


    


         

         


    

    

    


구계서원복건추배기실비
영남 사천에 대관대(大觀臺)가 있으니 이구암(李龜巖)선생이 독서하고 행차하는 곳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송규암(宋奎庵)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늦게 퇴계선생 도산서원 문하에서 스승의 자리서열에서 옷자락을 함께함이 많았다. 그 종지(宗旨)를 얻기 위하여 한편으로 스승을 모신 것은 선생과 같은 분은 없을 것이다. 선생께서 선조 병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영남이 바라는청선(淸選)에 문채를 거양하였다. 부제학에 이르러 누차 소명을 받았으나 임금에게 여러 번 아뢰기를 일찍이 수령으로 나가 인재교육에 전념하였다.선생이 사후에 사천의 노인들이 옛 이름인 석모(碩慕)선생으로 깊이 공경하고 그 대관대(大觀臺)도 선생을 공경하는 것 같이하고 서로 보호하여 오기를 여러 해였다. 수차 의논끝에 서원을 대관대앞에 지어 김충정공성옹선생(金忠貞公醒翁先生)이 일찍이 고을에 귀향오시어 후학을 계발하고 예속을 숭상하였으며 덕이 비등한 구옹(龜翁)을 함께 배향하였다. 숙종 임오년에 賢人(현인)을 장려하는 법에 힘입어 사액(賜額)이 내려 구옹선생(龜翁先生)을 해마다 제사를 오리는 것이 호물이 없으며 양선생를 높여 보답하기를 근 이백년을 한결같이 지켜왔다. 고종 무진년에 조정경장(조정경장)으로 서원의 제도가 혹은 존치하고 혹은 폐지하여 이 서원도 마침내 철폐를 당하여 이 때의 사림(士林)들이 매양 대관대를 지날 때 허리를 굽혀 공경함이양 선생의 영혼을 풀밭 언덕사이에 떨어져 처참함이 쑥대밭에 향기도 없는 것 같았다. 신축년에 사천사람들이 양 선생의 성덕을 잊지 못해 고개 단터에 단을 모아 간략한 제물을 차려 예를 올렸다. 무진년은 즉 철원(撤院)한 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는 해이다. 이때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타지방에도 철폐한 서원도 있고 혹은 중설한 곳도 있으니 곧 우리 유림도 중의를 가히 막지 못할 것인 즉 대개가 우리의 구계서원을 복건하지 않겠는가? 여러 사람의 중론이 감히 의논없이 종심자들의 수렴이 막혀 신미년 봄에 이를 공사를 마치고 양 선생을 다시 배향하니 여러 사람이 또 말하기를 우리 고장에 함의재(涵義齋) 최선생이 그 학문이 4서를 관통하고 더불어 마음이 제서(諸書)에 근접하여 일찍이 고하기를 자호의 의()는 옳은 것을 말한다. 정성과 정직함이 의를 가꾸지 아니한 즉 정이 그 정의에 맞지 아니하여 요행과 구차한 근심이 많을 것이다. 수신제가에 있어 의를 지키지 못하면 행실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편벽되고 거슬리는 병폐가 장차 나라와 천하에 옛것이 없고 그렇지 아니한 즉 의가 의가되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예학(禮學)에 깊은 관심이 있어 의례를 근본으로 하였다. 주자가례 및 동현논설의 절목요점을 나누고 합쳐 사례요의(四禮要義)한편을 지어 길흉의 상변하는 요점을 삼았다. 가장 퇴계선생을 존경하여 믿었고 일찍이 그 문집을 읽고 말하기를 노()선생이 으르기를 나의 마음을 경문에 얻어 공경하기를 신 같이 하고 선생의 글이 또한 그러하였다. 제자들은 대개 재사들이 모여 학업을 열어 권장한자 지금에 이르러 이에 의지함이 어찌 옛 말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졸하시니 어디에서 제를 올리겠는가? 이 서원에 배향함이 마땅한 일이다. 중론이 옳지 않음이 없었다.

어시에 사당에 모습이 새롭고 주벽에는 구암(龜巖) 성옹(醒翁)두분 선생을 모시고 함의재(涵義齋)선생도 함께 배향하였다. 한 지방의 선비가 울적한 정성을 펴니 유림이 다시 번성함을 바랄것이다. 여러 사람이 또 의논하기를 비를 세워 그 기원의 사실을 가려 하씨(河氏)의 재윤(載允) 최씨(崔氏)에 연무(演武) 두 사람이 서울에 찾아와 선생의행적을 모두 알고 있어항상 사모하는 향심이 간절한 고로 감히 노병을 빙자 사양할 수가 없어 간략하게 찬술하니 다음에 옛것을 찾아 알고 새로이 들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청을 받아들여 부기하기 바라노라.

신미년 10월상순

전가선대부규장각제학 동래鄭萬朝근찬

 



           



         






           

              
     
    


          



함의재공의 배위 사천이씨(泗川李氏)는 구암선생의 오대손이고 광복(光復)의 따님으로 사남을 낳으셨으니 장남 치문(致文)은 백부에 출계하고 차남 치덕(致德)은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으며 호는 이망헌(二罔軒)이요 三남은 致삼(致삼)이요 四남은 치수(致需)로 중추부첨지사요 나머지 치로(致露)를 두었다

 



남주공 최 연 국(南州公 崔演國)

 

  남주공의 휘는 연국(演國) 자는 선중(善仲) 호는 남주(南州)로 고종 23(병술1886)가선대부 장례원 전사 휘 형민(炯敏)과 정부인 동성이씨(東城李氏)의 장남으로 사천 구암에서 태어나셨다.

공의 시조는 고려 평장사 휘 천로(天老)이시고 진주 촉석루를 중창한 휘 복린(卜麟) 공의 십 칠대조가 되신다. 공은 어릴적부터 품행이 단정하고 명석한 두뇌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십칠세 되던 해에 진주관찰사가 주관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해서 만장의 선비들을 놀라게 하였다. 곧 체신사 주사가 되었고 스무살 때는 조선왕조의 통훈대부로 승진하는 영광을 입었다. 공은 경술국치를 당하여 관료에는 뜻을 접고 낙향하셨으며 혹 권하는 자가 있으면 세상이 예스럽지 못하니 나가면 의가 아니라고 하셨으며, 그 후 공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물을 풀어 농민들의 숙원인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개량하는 수리개발 사업에 몰두 하셨다. 공은 실로 그 시대의 선구자로서 미래를 내다보는 깊은 안목이 계셨다. 공이 이루어 놓은 저수지는 (두량저수지, 대곡저수지, 구암저수지) 그 규모 면에서도 개인이 만든 저수지로서는 나라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큰 규모였다.
공의 업적을 기리어 각 저수지에는 목리지역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송덕기념비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다.

또한 공은 교육진흥에 열과 성을 다하였으니 많은 일 가운데 몇 예만 들면 1910년에 명달보통학교를 설립하셨고(현 사천초등학교), 1920년에는 일신재단창립발기인이 되어 현재의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을 만드셨고, 1925년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오늘의 진주여고이다.

이러한 교육사업 참여 외에도 나병환자를 위한 전국적인 모금을 주도하시기도 하였다. 또한 공은 춘궁기에 수 백석의 곡식으로 빈민을 구휼하기를 의무처럼 여기셨고 대원군 서원철폐 이후 재정이 열악한 서원과 향교에는 수 백석의 재산을 쾌척하시어 (구계서원, 사천향교) 중창을 하시었다. 또한, 종중발전과 선산수호에(경남, 경기) 성력을 다하였다.

공이 참여한 직접사업으로는 도지정 정미소(대단위 정미소) 임자조합, 주일상회, 경남은행, 구암토지 주식회사등 설립 및 참여하셨다.

공은 많은 일을 하시는 중에도 학문을 놓지 않으시어 시문제술이 20여권이나 되었는데 6.25 동란에 모두 불타 없으시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서예는 경지에 이르러 지금도 몇 편 남아있는 작품이 세인을 놀라게도 하였다.

공은 슬하에 삼남 삼녀를 두었고 그 자제와 사위들은 현대사에도 족적을 남기는 인물들이 되었다.

공은 1951년 봄 66세로 세상을 뜨시었다.

공의 배위는 숙부인 문화유씨이다.

공의 역사적 평가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그 시대의 슬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후세의 현명한 판단과 정확한 사료로서 그 업적과 공과를 충분히 논하는 게 정도일 것이다.

여기에 현 성균관장이시며 대학교수이신 최근덕(崔根德)님이 쓰신 시 한편을 수록한다.

 

               맑은 기상(氣像) 밝은 재지(才智) 십칠 세에 떨친 문명(文名)

               내 몸 잊고 쏟은 열성(熱誠) 재물 흩어 덕()쌓았네

               경제진흥(經濟振興) 교육진작(敎育振作) 한결같이 애쓴 보람

                남을 위한 육십 평생 길이 길이 빛 있으리



           

 


대산 최 인 포 공 (大山 崔 寅 杓)

대산 최인포(崔寅杓 通仕郞文廟直員)공은 삭녕최씨 21세손으로  조선조 마지막 시대 儒敎 文學 석학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그는 朔寧 崔씨 4世孫 卜麟(복린)공이 重建한 晋州 矗石樓 현판 및 판각이 6.25로 사변으로 損失된 것을 재 복원하면서 판각내용에 (진주목사 강순) 과 (崔卜麟)공 이 힘을 모아 중건 했다는 내용이 빠지고  (老夫)라고 했든것을 바로 잡아 다시 제작하여 걸어 선조의 숭모봉향하고 유덕을 계승현창에 후손의 면모를 당당히 모여줌으로 서부경남의 모든 유생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지금도 晋州 矗石樓 현각 [矗石樓記]는 그날의 기록을 말하며 촉석류에 걸려있다.
또한 향교 문화계승에 앞장선 선비였다. 또한 귀암 구계서원 건립에(1931) 崔演國(최연국)씨와 더불어 總責을 맏은 泗川龜岩 龜溪書院 健立에 公憲者 이며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기 마지막 까지 구계서원 보전관리한 선비였다.

 그리고 개화에 앞장서 農學(일제 측량기술의 농촌에 보급)土地改良 事業 先驅者 이기도 했다

 공고롭게 공이 돌아가시든 그날 대관대 망루가 무너지며 큰 울음소리를 내어 슬픔을 같이 했다 한다.
지금은 대관대 망루는 폐허로 찾아볼길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남 사천에 구암리 이곳이 함의재공이 처음으로 웅거하여 살아오시든 곳 지금도 함의재공의 심오하고 명망 높은 학문과 유풍이 살아숨쉬는 선비의 고장 구암리에는 삭녕최씨 함의재공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 영남에서는 인재가 구암에서 나오지 않으면 없다 할 정도로 근대 현대를 거쳐 수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함의재공의 후손들은 선조의 유덕을 숭상하며 묵 묵히 공의 뒤를 이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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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천구암함의재종중     진돌2012.07.23 14:59:303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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