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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靖公, 諱 恒, 號 太虛亭)은 우리 삭녕최씨 가문(朔寧崔氏家門)을 명문(名門)으로 빛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시다. 문정공께서는 낭장공파(郎將公派) 5세로서 조선왕조(朝鮮王朝) 7대 세조(世祖)13년(1467, 정해(丁亥)에 최성(崔姓)으로서는 최초로 ‘1인 지하요 만인지상 (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領議政)에 오르심으로써 우리 삭녕최씨 뿐만 아니라 모든 최씨(凡崔氏)를 파벽(破僻)케하신 위대한 인물이시다. 공은 경사(經史)와 음운(音韻)에 밝은 대학자(大學者)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창제에 큰 공을 세웠으며 또한 당대의 8문장(八文章)으로서 공의 글월은 매우 수려(秀麗)하고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막힘이 없었으며 20년 동안 문형(文衡=大提學)을 잡으시고 조정(朝廷)의 고문대책(高文大冊)과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모두 공의 손에서 이뤄졌을 정도여서 그의 문명(文名)은 중국에까지 크게 떨쳤던 것이다. 공은 또한 조선 초기 문물제도(文物制度)의 정비에 큰 공을 세우시었으며 세종조(世宗祖)에 출사(出仕)하시어 성종조(成宗朝)에 이르기까지 6대 임금을 모시면서 40년 동안 한번도 외직으로 물러나신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 한번도 남으로부터 탄핵(彈劾)을 받은 일이 없으시었다. (立朝四十年一不被論) 공은 천품(天稟)이 어질고(仁慈) 과묵(寡黙)하시며 성격이 매우 겸손(謙遜)하시고 누구에게나 공손(恭遜)하시며 스스로 검소(儉素)하시고 매사에 대범(大凡)하시며 모든 일에 바르시고(正明) 항상 온화(溫和)하신 도경군자(道經君子)로서 수충위사 협찬 정난공신 (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 수충위사 동덕 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2등, 순성명량 경제홍화 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책훈(策勳)되시는 등 3훈공신(三勳功臣)에 오르시고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책봉되시었으며 졸후(卒後)에 조정(朝廷)에서는 문정(文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시었다. 이곳 문정공 묘역(文靖公墓域)은 나라에서 하사(下賜)한 사패지(賜牌地)로서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마리와 무수리 일대이며 정경부인 달성서씨(貞敬夫人達城徐氏)할머니를 위시하여 공의 큰 아드님이신 석포공(石圃公, 永潾, 禮曹參議)과 맏손자이신 사직공 (司直公, 秀英)의 묘단(墓壇), 사직공의 큰 아드님이신 집의공(執義公, 濬哲), 집의공의 아드님이신 승지공(承旨公, 諱 繼宗), 지평공(持平公 諱 頲)등 문정공의 사손(嗣孫)들이 함께 잠들어 계신 성지(聖地)이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마리 기현(丌峴)에 손좌(巽坐)로 모신 문정공(文靖公 諱 恒)의 산소는 지금으로부터 530여 년 전에 나라에서 장지를 정하고 예장(禮葬)하였으며 이 산소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약 380여정 보에 이르는 땅이 문정공의 사패지(賜牌地)로서 오늘날까지 문정공종중(文靖公宗中)의 종산으로 세습되고 있다. 번천 고개 넘어 도마리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 2000년 4월에 전남 낙안에서 재석석재를 경영하고 있는 광범(光範)씨가 삭녕최씨 세장동 비를 세워서 종문의 터전임을 과시하고 있으며, 문정공 묘하에 그 왼편으로 문정공의 사당이 있고 그 오른편의 앞쪽에 제각인 영모재 (永慕齋)가 있으며 그 뒤에 종가가 있다. 그리고 문정공 사당 뒤에 시조공 및 중시조공과 1세조에서 4세조까지의 선조를 모신 숭덕단(崇德壇)을 1993년 가을에 봉설 하였으나 입지가 부적절하여 정경부인 묘소 우측으로 확장 이설하여 매년 10월3일(개천절)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태허정 최항(太虛亭 崔恒)은 정난, 좌익, 좌리공신에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과 영경연 춘추관 예문관 홍문관 관상 감사를 겸하고 영성부원군에 봉군되어 66세에 서거하니 남한산성하의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마리 기현에 예장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그의 배위인 정경부인 달성서씨는 달천부원군 서미성(徐彌性)의 따님이고, 양천 권근(權近)선생의 외손녀요, 대제학 권제(權踶)의 생질녀이며, 사가정 서거정 (徐巨正)의 누님으로 재능이 뛰어나 관찰하는 식견이 높았는데 태허정공(문정공)의 장지를 둘러보고 두 아들(참의공과 찬성공)에게 이르기를 「 이곳은 절손(絶孫)이 될 혈(穴)이니 마땅히 이장을 해야 좋겠으나 나라에서 정한 예장지지(禮葬之地)이기 때문에 감히 이장은 할 수 없으므로 내가 죽거든 반드시 각장(各葬)으로 하라」고 하여 문정공과 각장으로 할 것을 결심, 문정공묘에서 마주보이는 타혈에 직접 자기의 묏자리를 정해 두고 후일에 정경부인을 이곳에 따로 장례하게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국초로부터 행하여진 군왕의 사패의 뜻에 의한 재상의 가묘제도가 얼마나 엄격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 전서(靑莊館全書)에 따르면 부인중에 풍수설에 뛰어난 사람으로 중국의 곽경순(郭景純)과함께 최항 (崔恒)의 부인 달성서씨(達成徐氏) 곧 서거정(徐巨正)의 누님을 들고 있다.
- 동야유집(東野類輯)에서-
참의공은 사예공(4世)의 장손이요, 문정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字)를 천명(泉明), 호를 석포(石圃)라 하였으며 생졸년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행장은 세조8년(1462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세조12년(1466년)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종4품)으로 있으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예종1년(1469년) 사담시 정(司膽寺 正 정3품)이 되고 성종1년(1470년)에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부승지(承政院副承旨: 正三品 堂上官)가 되고 성종3년(1472년) 형조참의를 거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성종13년 (1482년)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배위 숙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대호군 효림(孝林)의 따님으로 일남을 두고 작고하셨으며 계배위 숙부인 고령 박씨(高靈朴氏) 는 감사 건순(健順)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었다. 1자는 수영(秀英)으로 사직을 지내고 사직공파의 파조(派祖)가 되었으며 2자는 수웅(秀雄)인데 정략장군으로 좌통례에 증직되어 통례공파의 파조가 되었으며 3자 수걸(秀傑)은 부사정을 지내고 사정공파의 파조가 되었으며 1녀는 경주인 최수준(崔秀俊)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문정공묘 서강(西岡) 미좌(未坐)에 있으며 묘비가 있다.
사직공(7世)은 문정공의 장손이요 참의공(석포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학문에 충실하였으며 절의(節義)가 있어 통훈대부 사직(通訓大夫司直)으로 있다가 연산학정(燕山虐政)에 항소(抗疏)하고 양주(楊州)에 은거하였다. 당시 선비들의 시에 이를 두고 슬픈 일이라 하였다. 배위 성주이씨는 부사 숙생(叔生)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으며 묘는 양주 축석현에 있다고 구보(舊譜)에 기록되어 있으나 후손이 수호하지 못하고 실전하여 광주 정경부인 달성서씨 묘소좌강에 묘단을 설치하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1자 준철(濬哲)): 사용(司勇) 증 집의(執義), 묘는 문정공묘하 손좌로 있다.
2자 준문(濬文): 대호군, 묘는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두 모현 계좌로 있다.
3자 준명(濬明): 도총부 도사, 묘는 금천(衿川)에 있다.
남강공(10世)은 통례공의 증손이요 삼계공의 2자로 1528년(중종 23년, 戊子)에 태어나 퇴계 이황(退溪 李滉)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1546년(명종 1년, 丙午)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1555년9명종 10년, 乙卯)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한원(翰苑)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고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계속하여 이조좌랑과 이조정랑(吏曹佐郞 正郞: 正5品)을 거쳐 사인(舍人: 正4品), 대사성(大司成: 正3品 堂上官), 대사간(大司諫), 직, 부제학(直, 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영백(嶺伯: 慶尙道 觀察使: 從2品, 대사헌(大司憲), 예조참판(禮曹參判: 從2品)등을 역임하고 1582년(선조 15년, 壬午) 55세에 졸하였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진주 강씨로 판관 강의(姜儀)의 따님이며 묘는 성남시 금호동 월온내 고개 동쪽 간좌(艮坐)로 있고 묘비가 서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원년(1568, 무진(戊辰) 6월 9일(丁亥)조를 보면 “조강(朝講)이 있었다. 이날은 영상 이준경(領相 李逡慶), 지사 오겸(知事 吳謙), 승지 최옹(承旨 崔顒), 응교 유희춘(應敎 柳希春), 지평 채난종(持平 蔡蘭宗), 헌납 최정(獻納 崔頲)이 입시(入侍)하였다. 소란스런 빗소리에 말이 잘 들리지 않자, 상(上)이 강독관(講讀官)들을 어탑(御塔)앞으로 가까이 앉게 하고 논어(論語)의 계문자(季文子)와 영무자장(甯武子章)을 진강(進講)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날 조강에 나란히 입시하신 남강공(南岡公 崔顒)과 지평공(持平公 崔頲) 형제분은 통례공(通禮公)의 증손이며 삼계공(三溪公 崔彦粹)의 둘째와 셋째 아드님으로 당대에 문명(文名) 떨쳤으며 우리 문중(門中)의 영예요 자랑이었다.
지평공은 통례공의 증손이요, 삼계공의 3자로 1533년(중종 28년, 癸巳)에 출생하여 중형인 남강공과 문과 급제한 같은 해인 1555년(명종10년, 乙卯)에 진사에 급제하고 1561년(명종 16년 辛酉)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한원(翰苑)ㅡ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쳐 성균관 교리(成均館 校理: 正5品), 지제교 (知製敎)를 역임하고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正5品)을 끝으로 병을 얻어 1569년(선조2년, 己巳)에 37세로 졸하였다. 배위는 숙인(叔人) 양천 허씨로 지평 허시(許時)의 따님이며 묘는 광주 문정공묘 서강 유좌(酉坐)에 있고 묘비가 서 있다.
부사공 최무(崔茂)의 字는 임종(林宗)이요, 호는 대치(大痴)이며 태허정 문정공 최항(崔恒)선생의 8세손이요, 통례공 최수웅(崔秀雄)의 6세손이고, 지평공 최정(崔頲)의 손자로서 서기 1582(선조임오)년생이요, 광해조 2년 경술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세마(洗馬)를 거쳐 9개읍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칠곡부사에 이르렀다. 1649(인조 27년 기축)년 4월 21일 졸하니 묘는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산47번지 묘좌 유갈이며 배위는 숙인전주이씨로서 현감 춘향의 따님이며 아들 1분을 두었으니 사재감 직장(司宰監 直長) 최입지(崔立之)요, 묘는 광주시 엄미리 동강이라 계배위 숙인 전주이씨는 부호군 이재 (李縡)의 따님으로 생 1남하였으니 선교량 최직지(崔直之)라. 묘는 온양에 있으나 실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