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의 숨결 > 남원
남원(南原)은 예로부터 큰 고을로서 대성(大姓)과 명족(名族)이 많으나 그 가운데서도 삭녕최씨(朔寧崔氏)가 가장 번성하였다. 이 곳 남원의 삭 녕최씨 통례공파 선세(先世)는 훌륭한 업적(業績)으로 우리 가문(家門)을 빛내왔으며 대대로 덕(德)을 쌓아 이어 내려왔다. 남원의 삭령최씨 통례공파는 파조이신 통례공(通禮公 秀雄: 문정공의 손자)께서 1491년(6대 성종22)에 처가(妻家: 晋州河氏)가 있는 남원땅으로 낙남 (落南)하신 이래,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정훈(庭訓)을 충실히 계승하여 익히고 열심히 공부하여 6대 문과(六大文科), 8한림(八翰林), 5옥당(五玉堂), 3은일(三隱逸), 6조두(六俎豆)와 13대 진사(十三代進士)를 배출함으로써 경향(京鄕)에 그 명성(名聲)을 크게 떨쳤다. 특히 통례공파에서는 한 섬돌 위에서 대대로 학덕(學德)이 높으신 현조(顯祖)들이 줄줄이 나오시어 사액서원(賜額書院) 인 노봉서원(露峯書院)에 삼계공의 손자이신 미능재공(未能齋公, 尙重)과 미능재공의 셋째 아드님이신 폄재공(砭齋公, 薀)과 미능재공의 손자요 성만공의 큰 아드님이신 오주공(鰲洲公, 徽之)등 3대의 세분이 배향 되시었고 방산서원(方山書院)에 통례공의 손자이신 삼계공(三溪公, 彦粹)과 삼계공의 증손자요, 미능재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성만공(星灣公, 衍)의 두 분이 배향되시었으며 덕계서원(德溪書院)에 삼계공의 증손자이신 쌍백당공(雙栢堂公, 遠)이 배향되신 외에도 성만공의 둘째 아드님이며 폄재공의 양자 이신 간호공(艮湖公, 攸之)과 성만공의 손자이며 오주공의 넷째 아드님이신 동강공(東岡公, 是翁)께서도 서원배향(書院配享)의 논의가 있었으나 당시의 사색당론(四色黨論)관계로 무산된 바 있었다. 이와같이 통례공파는 통례공께서 남원으로 낙남하신지 500년이 넘도록 그 후손들이 대대로 청환요직(淸宦要職)을 거치면서 명문(名門)으로서의 가문(家門)을 빛내어왔다.
남원시에서 북쪽으로 30리 거리인 남원군 사매면 계수리 구선동(九仙洞)은 예로부터 아홉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을 지닌 이름난 명당으로서 삭녕최씨 통례공파 도선산(都先山)이 있는 곳이다.
제각인 노유재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간직한 유서깊은 건물로서 1978년 문화공보부로부터의 문화재적 가치의 인증과 함께 국고보조를 받아 보수 공사를 한바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새로운 단결력을 결집하여 종중을 혁신하고 종족을 유신함으로써 선조 및 후손들에게 그리고 국가사회에 부끄럽지 않게 자랑스러운 가문으로 발전시키자는 뜻에서 1979년 8월 19일 은행나무 앞에다 「慕先創新紀念碑」(모선창신기념비)를 세웠다.
노유재앞에 서있는 큰 은행나무는 1300여년의 수령을 지닌 천연기념물로서 우리 삭녕최씨의 오랜 융성과 발전을 상징하고 있다.
통례공께서 이곳에 잠드신 1492년(성종 23년)으로부터 금년이 꼭 503년째가 되는 바 그동안 우리 삭녕최씨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려 크게 위세을 떨쳤으며 세상 사람들은 이곳 삭녕최씨 선산을 가리켜 「삼림(三林)의 묘역」이라 일컬어 왔으니 첫째, 공훈림이요(功勳林: 나라에 세운 공으로 숲을 이루었고) 둘째, 비여림이며(碑如林: 공적을 새긴 비석으로 숲을 이루었으며) 셋째, 노송림이라(老松林: 삭녕최씨 선산에는 가는 곳마다 그들의 기개 (氣慨)를 상징하듯 천년노송이 하늘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태고적 엄숙함과 근엄함이 가득하다는 뜻)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말은 다 옛이야기이고 이제부터 우리는 조상에 대한 숭모심(崇慕心)을 결집(結集)하여 한결같이 대동단결(大同團結)함으로써 바야흐 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통례공 최수웅은 세조 10년(1464) 서울 서소문안에서 문정공 최항(文靖公 崔恒)의 손자이며 참의공 최영린(參議公 崔永潾)의 2자로 태어났다. 일찍이 음사(蔭仕)로 충의위 정략장군(忠義衛 定略將軍, 종4품)에까지 올랐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진데다 신병을 얻어 하씨부인(河氏夫人)과 함께 멀리 전라도 남원군 둔덕방 윗골의 처갓집으로 요양차 내려 왔다가 서울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성종 23년(1492) 8월 11일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애통하기 그지 없었으며 뒤에 통례원 좌통례(通禮公 左通禮, 정3품)에 증직되었다.
이리하여 통례공은 삭녕최씨 통례공파의 낙남파조(落南派祖)가 되었으며 통례공파 자손들이 이로부터 500년 동안이나 남원 일대에 뿌리박고 크게 번성하여 왔다. 묘는 남원군 사매면 계수리 노적봉하 구선동(露積峯下 九仙洞)에 유좌(酉坐)로 있고 배위 증 숙부인 진주하씨는 사직 하응(司直 河應)의 따님으로 묘는 쌍봉이며 묘비가 서있다.
삼계공 최언수는 문정공 최항의 현손이요, 통례공의 손자이며 승지공 최준원의 독자로 연산6년(1500)에 남원 둔덕방 윗골(현재는 임실군 오수면 둔 덕리 상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학에 뛰어났다.
중종23년(1523) 진사에 합격하고 중종32년(1537) 천사별시 문과(天使別試 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정6품) 으로 있을때, 당시의 권간 윤원형(權奸 尹元衡)과 요승 보우(妖僧普雨)를 내치고 정사(政事)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글을 임금에게 올리고 남원으로 퇴거하였다. 그때부터 조부인 통례공 산소 남쪽언덕에 영모당(永慕堂)을 짓고 그 옆에는 망북대(望北臺)를 세워 멀리 임금이 계신 대궐과 선영(先塋)을 향하여 조석으로 첨배(瞻拜)하며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추만 정지운(秋巒 鄭之雲)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더불어 예학(禮學)을 강론하고 도의로써 교유하면서 한결같은 충절(忠節)을 생활화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명종 5년(1550) 12월 3일 51세에 서거하였으며, 이조참판 겸 홍문과 제학(提學, 종 2품)이 증직되고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여주민씨로 군수 민활(閔㓉)의 따님이고 묘는 통례공묘 위쪽 오른편에 신좌(辛坐)로 쌍봉이며 묘비가 있다.
삼계공(9世)은 통례공 낙남 이후 3대째에 처음으로 문과에 올랐고 이로부터 내리 6대에 걸쳐(14世까지) 8명의 대과(大科=文科) 급제자를 냄으로써 삼남(三南)의 으뜸가는 가문을 이루었으며, 특히 한집안에서 3은 5옥 8한(三隱逸, 五玉堂, 八翰林)을 배출시켜 명성이 더욱 자자하였다.
특히 삼계공은 조부인 통례공과 아버지 승지공이 두분 다 30전에 요절한 가정에 독자로 태어나서 슬하에 아들만 4형제를 두었으며 1자 승지공(承旨公 , 潁, 贈 左承旨), 2자 남강공(南岡公, 顒, 禮曹參判), 3자 지평공(持平公, 頲, 司憲府 持平), 4자 목천공(木川公, 頔, 贈 左承旨)등 4형제가 모두 현달(顯達) 하고 승지공파, 남강공파, 지평공파, 목천공파 등 4파를 이루어 대대로 창성함으로써 통례공파의 중흥조가 되었다.
승지공 최영(10世)은 통례공의 증손이요 삼계공의 1자로 중종 16년(1521)에 남원 둔덕방 윗골에서 태어나 충의위 어모장군(정3품)을 역임하고 질병을 얻어 과거를 폐하였으며 선조 17년(1584)에 64세로 졸하였다.
뒤에 아드님인 미능재공(未能齋公, 尙重)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훈됨으로써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증 숙부인 홍주송씨로 현감 송구(宋駒)의 따님이며 1남(未能齋 尙重) 1녀(楊士衡: 文科, 郡守)를 두고 91세에 졸하였다. 묘는 통례공묘의 좌강에 동향으로 합폄되어 있다.
목천공(10世)은 중종 30년(1535) 9월 18일 남원 둔덕방 윗골에서 삼계공의 4자로 태어나 선조 15년(1582) 진사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자 상겸(尙謙)과 더불어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의거하였다.
선조 29년(1596) 2월 1일 61세로 졸하니 임란공(壬亂功)으로 좌승지(左承旨)가 증직되었으며 배위는 증 숙부인 남양홍씨로 종묘서령(宗廟署令) 증 이조참판 홍덕윤(洪德潤)의 따님이다.
묘는 구선동(九仙洞) 통례공묘 위쪽 좌록(左麓)에 유좌(酉坐)로 합장되었고 비석이 있다
미능재공(11世)은 명종6년(1551) 8월 27일 삼계공의 장손(長孫)이요. 승지공 영(穎)의 독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주와 인품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문인(門人)으로 대성하였으며 평생을 독학역행(篤學力行)하고 위세소추(爲世所推)하였다.
선조 9년(1576) 진사에 합격하고 선조22년(1589)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翰林)을 비롯하여 집의(執意)․ 사간(司諫)에 이르기까지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명성을 떨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창의(倡義)하였고 도원수 권율장군의 계청으로 그의 종사관이 되어 운량장(運粮將)을 맡아 행주대첩 등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왕명으로 호남초유사(湖南招諭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책훈되었다.
선조 35년(1602) 봄에 벼슬을 버리고 구례로 낙향하여 책을 벗삼아 수양(修養)에 더욱 힘쓰다가 선조 37년(1604) 3월25일 졸하니 나라에서는 도승지를 내리고 뒤에 2자 성만공(星灣公)의 공(功)으로 대사헌 겸 세자좌부빈객(大司憲 兼 世子左副賓客, 從二品)을 추가로 증직하였으며 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文集)이 1권 있으며 아들 성만공과 폄재공, 손자 오주공과 간호공의 문집 각 1권씩을 합하여 후손들이 대방세고(帶方世稿, 世稱 五賢集 全5卷)를 간행하여 전하고 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남원윤씨로 진사 윤충(尹沖)의 따님이며 묘는 통례공묘의 좌강에 동향으로 합장되었으며 묘비가 있다.
진산공 최상겸(11世)은 명종 22년(1567) 삼계공의 손자이며 목천공의 3자로 태어나 선조23년(1590)에 진사에 오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목천공을 딸라 창의(倡義)하여 고경명(高敬命)을 도와 공을 세웠으며, 음사(蔭仕)로 종친부 전첨(典籤: 正4品)을 거쳐 화순, 금구, 진산 등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선정덕치하여 백성들이 진산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송덕하였다.
인조 22년(1644) 12월 15일에 79세로 졸하였다. 배위는 영인 남양홍씨이며 첨정(僉正) 홍붕(洪鵬)의 따님이다. 묘는 목천공묘 아래 유좌(酉坐)에 합장되었고 묘비가 서 있다.
진산공 최상겸(11世)은 명종 22년(1567) 삼계공의 손자이며 목천공의 3자로 태어나 선조23년(1590)에 진사에 오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목천공을 딸라 창의(倡義)하여 고경명(高敬命)을 도와 공을 세웠으며, 음사(蔭仕)로 종친부 전첨(典籤: 正4品)을 거쳐 화순, 금구, 진산 등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선정덕치하여 백성들이 진산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송덕하였다.
인조 22년(1644) 12월 15일에 79세로 졸하였다. 배위는 영인 남양홍씨이며 첨정(僉正) 홍붕(洪鵬)의 따님이다. 묘는 목천공묘 아래 유좌(酉坐)에 합장되었고 묘비가 서 있다.
쌍백당 최원(崔薳)은 선조32년(1599)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字는 원지(遠志)이고, 호는 쌍백당(雙栢堂)이다. 목천현감 적(頔)의 손자이고 전력부위 상근(尙謹)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기질과 품성이 돈후하고 인자하였다. 재종형 성만공 최연(崔衍)과 폄재공 최온(崔薀)의 문하 에서 공부하였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때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아 북으로 향하던중 공주에 이르러 강화됨을 듣고 통곡하면서 돌왔다. 평생동안 벼슬길에 뜻이 없어 성리학에 전심하던중 통덕랑, 천문교수에 천거하니 빙긋이 웃으며 취임하지 않고 학문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어머니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시묘(侍墓)하였다. 묘앞에 잣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그가 그 나무를 움켜잡고 날마다 슬피울어 나무가 말라죽게 되니 사람들이 그를 중국 진나라때의 유명한 효자 왕상(王祥)에 견주어 그 곳을 쌍백당(雙栢堂) 이라고 불렀다. 현종1년(1660)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3세였다. 묘는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기리에 있다.
배위는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증좌찬성 안인(安認)의 따님이며 합부하였다. 정조17년(1793) 매계서원(梅溪書院)에 배향되어 남원, 임실, 장수, 구례, 곡성등지의 유림들이 모여 봄,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남원향교에서도 제관을 보내어 분향하고 있다.
창성공(12世)은 삼계공의 증손이요, 미능재공의 1자로 선조 7년(1574)에 태어나 재예와 인품이 빼어났으며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해남현감을 역임하고 정묘호란때 왕을 호종하여 정3품 통정대부에 올라 창성부사를 지내고 인조 12년(1634) 12월 28일 61세로 졸하였다. 배위는 숙부인 전주 이씨로 증 판서 이엽(李曄)의 따님이며 묘는 통례 공묘 위에 동향으로 합장되었다.
슬하에 독자 익지(翼之)를 두었는데 선조 23년(1590)에 출생하여 광해 8년(1616)에 진사에 급제하고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 正5品)를 지냈다.
폄재공은 통례공의 6세손이요 삼계공의 증손이며 미능재공의 3자로 선조16년(1583) 2월 10일 출생하였다.
천품이 영명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으며 광해 1년(1609)에 진사에 합격하고 이어 대과에 대비하여 만전을 기하고 있었으나 광해 혼조가 우심해지고 문과 급제 후 당시 좌랑으로 있던 중형 성만공이 대북파 간신배에 의해 파직되어 귀향하자 세상의 영달에 뜻이 없어 과거를 폐업하기로 결심, 구례 잔수 나루터에 용두정(龍頭亭)을 짓고 두문불출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몰두하였다.
1623년(癸亥)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맨 먼저 천유일(薦遺逸)로 재랑(齋郞)이 제수되엇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인 인조 원년(1624)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중형 성만공과 함께 창의하였으며 이듬해 인조 2년(1625) 2월에는 빙고서 별제(氷庫署 別提, 正6品)를, 7월에는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從5品)등을 비롯하여 많은 벼슬을 계속해서 내렸으나 명리에 뜻이 없고 오직 학문의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 다. 인조 10년(1632)에는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제수하니 그때 세자로 책봉된 소현세자(昭顯世子) 아래로 열네살의 봉림대군(鳳林大君: 뒷날의 孝宗大王)과 열한살의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지성(至誠)으로 훈도화육(薰陶化育)하여 인조대왕께서 「양대군의 학업이 근래에 크게 진전된 것은 다름아닌 좋은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다」하고 크게 기뻐하며 폄재공께 상으로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인조 14년(1636) 여름에 세자 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 洗馬, 正9品)를 제수하자 조정의 재신(宰臣)들이 폄재공의 덕행(德行)과 재학(才學)을 높이 기리어 연석(筵席)에서 품계를 올려 다시 천거하므로 이때 폄재공께서는 낙향하는 심정에서 순창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또 창의하였으며 서울에 당도하기 전에 청주에서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환, 세상사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백성들이 공의 청백휼민과 선정위덕을 기리어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인조 17년(1639)에는 비안 남평현감에 연달아 제수되고 인조 24년(1646)에는 세자익위사 사어(司禦: 從5品)가, 이듬해 (1647)에 또 의금부 도 사(都事: 從5品)가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였다.
1649년 5월 인조가 승하하여 효종이 즉위하고 성복한 이튿날 예스승인 공을 특명으로 부르시니 감읍하여 나아갔으며 그해 6월에 성균관 사업(司業) 을 제수 받았으나 인산(因山)이 끝나자 곧 병을 칭탁하고 귀향하자 10월에 또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을 제수하였고 효종2년(1651)에 또 김제 군수를 효종4년(1653)에는 연달아 진선(進善) 장령(掌令: 正4品)을, 이듬해인 효종 5년(1654)에는 또 연달아 장령․군자감정(軍資監正: 正3品) 군기 시정(軍器寺正: 正3品)을, 효종 7년(1656)에는 또 장령을 , 이듬해인 효종8년(1657)에는 또한 특별히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 正3品 堂上官)를 제수하였으나 이미 나이 많고 병쇠함을 상주하고 이모든 벼슬을 받지 아니하였다.
효종 9년(1658) 12월 22일 마침내 공의 나이 76세에 가벼운 감질로 자리에 들었다가 반듯이 누운채 잠자듯이 숨을 거두니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시 고 애도하시며 특의 2品을 내리시고 모든 장수(葬需)를 지급함과 동시에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케 하였다. 묘는 구선동 재실 우록에 경좌(庚坐)로 있고 묘비가 서있으며 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흥덕장씨로 현령 장경세(張經世)의 따님이며 묘는 공묘 위로 수 10보쯤 떨어져 동향으로 있고 표석이 있다. 재취 숙부인 문화유씨는 처사 유호(柳灝)의 따님이며 묘는 합장하였다.
숙부인 흥덕장씨와 문화유씨의 두분 모두 무육(無育)하고 중형인 성만공의 2자 간호공 攸之를 사자(嗣子)로 삼았다.
좌랑공 최용지의 자는 자능(子能)이며, 인조17년(1639)에 쌍백당 원(薳)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인품이 준엄하여 원대한 도량을 갖고 무인으로 무예를 익혔으며 현종13년(1672)에 등과하여 비변랑, 선전관, 도총경력, 제주점마사(濟州鮎馬使)를 역임하였다. 그후, 해남현감, 공조좌랑, 철산부사를 지내고 숙종15년(1669) 낙안현감 재직시 기사환국을 맞아 성우계(成牛溪) 이율곡(李栗谷) 두 선생을 출향하니 묘정에서 위판을 모셔다가 정결한 곳에 매안한 뒤에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두 선생은 동방의 큰 현인이라, 도가 한때 껶였으나 반드시 만세에 신원될것이니 지금 액운을 만났 으나, 저들은 욕이 될것이고, 우리들에게는 행운이 될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691년 낙안을 떠나니, 선정을 기리는 거사비가 세워졌고 숙종20년 (1694)에 다시 공조좌랑에 제수되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숙인 전주유씨(증참판 정린(廷潾)의 女)와 상주박씨 통사랑 유신(惟信)의 女와 삼합폄으로 남원시 사매면 모사정리에 있다.
남원시에서 남쪽으로 약 80리 거리에 위치한 전남 구례군 구례읍 월암리 잔수 선산(潺水 先山)은 통례공의 6세손이요 미능재공의 2자인 성만공(星灣公, 衍 12世)의 묘역으로 영사재(永思齋)는 그 제각이다.
성만공은 오주(鰲洲, 徽之) 간호(艮湖, 攸之: 숙부 폄재공 앞으로 出系) 형제분을 두었으며 또 오주공은 정옹(靜翁, 奉直郞) 서옹(瑞翁, 早卒) 치옹(致翁, 號 收春子, 文科 翰林 持平) 시옹(是翁, 號 東岡, 逸 持平) 계옹(啓翁, 號 迂窩, 文科 司諫, 牧使)등 5형제를 두었고 간호공은 거옹(擧翁, 奉直郞) 재옹(載翁, 進士) 기옹(綺翁, 進士)등 3형제를 두어 성만공의 손자가 8종형제로서 세칭 8옹 군자(八翁君子)라 일컬어 온바, 이곳 구례 종중 (求禮宗中)이 바로 8옹 후손들의 종중으로 이를 만계종중(灣溪宗中)또는 산남의장(山南義莊)이라 한다.
성만공은 통례공의 6세손이요, 삼계공의 증손이며 미능재공의 2자로 선조 9년(1576) 5월 28일 출생하였다. 공은 품성이 지효(稟性至孝)하고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자라서는 독학역행(篤學力行)하여 선조 36년(1603)에 진사에 급제하고 또 같은 해 대과(大科 =文科)에 올라 괴원(槐院)에 들었다.
공은 낭관(郎官)으로 있던 광해군 4년(1612)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경사(經史)를 벗삼아 금기(琴碁: 거문고와 바둑)를 즐기면서 12년동안을 두문 불출하다가 1623년(癸亥)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말미암아 사헌부 장령(掌令: 正4品)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아우인 폄재공 온(薀)과 더불어 창의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대를 받았으며 평란뒤에 관직도 곧 사임하였다.
이듬해인 인조 3년(1625)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 正5品)로 있다가 요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갈 것을 청하여 광산군수(光山郡守)로 부임하였으나 머지 않아 병으로 사임하였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의병 소모관(義兵 召募官)으로서 공이 컸으며 인조 8년(1630)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인조 12년(1634) 가을에 응교(應敎: 正4品)에서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正3品)를 초배(超拜)하였고 인조 14년(1636) 겨울에는 좌승지(左承旨) 로 인조대왕을 남한산성에 홍종하였으며 이듬해 봄에 환경(還京)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 正3品 堂上官)를 배명받았다가 그해 여름에 호종의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從2品)에 오르고 한성부 좌윤(左尹)에 배명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와의 강화가 성립됨을 부끄럽게 여겨 비분강개(悲憤慷慨)함을 참지 못하고 곧 귀전(歸田)하였으며 그뒤 여러번 부르심을 받았으나 집안 의 종손(宗孫) 요절로 인한 체봉종사(替奉宗祀)를 이유로 끝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 1648년(인조 26)에 무자보(戊子譜) 간행 공은 효종 2년(1651) 12월 10일 가벼운 감기 기운으로 자리에 누으셨다가 잠든 듯이 눈을 감으시니 향년 76세였다. 임금께서는 공의 부음을 들으시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케 하였으며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에 세자 좌빈객(正2品)을 증직하였다. 묘는 전남 구례읍 신월리 잔수에 임좌(壬坐)로 있으며 묘비가 서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남원양씨(南原梁氏)로 군기시 주부 양준우(梁俊遇)의 따님이며 슬하에 오주공(鰲洲公, 徽之)과 간호공(艮湖公, 攸之)형제를 두 시었다.
공은 미능재공의 손자요. 성만공의 1자로 선조 31년(1598) 10월 5일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빼어나고 총명이 절인하여 이미 7~8세 때 글을 가르치던 폄재공께서 크게 기특히 여겨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하였다. 13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암송하였고 14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였으며 15세 때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 혼정으로 원대한 기상을 펴지 못하고 있다가 인조 2년(1624)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인조 8년(1630)에 천유일(薦遺逸)로 금오랑(金吾郞=義禁府 都事, 從5品)이 제수 되었으나 그해 7월 12일 조모상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계부(폄재공)를 따라 창의하였는데 서 울을 향하여 올라가던 중 청주에서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 모든 일에 뜻을 잃었으며 고향에 돌아와 회양(晦養)에 더욱 힘썼다. 그 뒤에 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 부솔(副率), 익위(翊衛)등의 벼슬이 계속하여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효종10년(1659) 영릉(寧陵) 복설(復雪)을 계기로 조정의 유현(儒賢)들이 서로 천거하여 공조좌랑이 제수되니 감격 출사하였으나 머지 않아 사임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현종10년(1669) 12월 9일 자는 듯이 고이 눈을 감으니 향년 72세였으며 노봉서원(露峯書院)에 배향되었다.
묘는 구례 잔수에 계좌(癸坐)로 있으며 묘비가 서있다.
배위 전주이씨는 동지(同知) 증 영의정 이유간(李惟侃)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두었으며 재취 남원양씨는 좌랑 양원(梁榞)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었다.
공은 미능재공의 손자요 성만공의 2자로 선조36년(1603) 4월 13일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질이 정수하고 기도(器度)가 심후(深厚)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공이 10세때(1612) 성만공께서 광해혼조로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내놓고 전원으로 돌아와 계셨으므로 백씨인 오주공과 더불어 아버지 앞에서 글읽기를 즐겨하였다. 인조 8년(1630) 진사에 합격하여 인조 11년(1633) 종사랑(正9品), 이듬해에 통사랑 (正8品)이 되고 인조 14년(1636)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2월에 청과 강화가 성립되어 세자와 왕자가 심양으로 볼모로 가게 되었을때 공은 세자 익위사 세마(洗馬)로서 세자일행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공은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몸으로 형제가 없으니 배종을 면하게 허락하여 달라고 청원하 여 윤허를 받았으며 그해(1637) 경양도 찰방(從6品)으로 나갔다. 인조 20년(1642) 10월 27일 모친상을 당하였으며 인조 23년(1645) 승의랑(正6 品) 종묘서 직장(宗廟署 直長: 從7品)으로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阮)에 들었고 이듬해에는 한원(翰苑)에 천거되었다. 인조26년(1648) 오 수도 찰방이 되고 구례현감과 강진현감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병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 집의와 사간원 사간 을 역임하고 제자시강원보덕 홍문관교리 지재교겸 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을 지내고 헌종11년(1670) 사헌부 집의를 끝으로 항소하고 사임하였다가 헌종 14년(1673) 4월 23일 졸 하니 향년 71세였다. 당시 사림에서 노봉서원에 제향(躋享)하고자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다. 묘는 구례 잔수 자좌(子坐)로 있고 묘비가 있으며 배위는 숙인 풍양조씨로 부윤 방직(邦直)의 따님이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자 거옹(擧翁: 奉直郞), 2자 재옹(載翁: 進士), 3자 기옹(綺翁: 進士), 1녀 김재현(金載顯: 慶州人, 參判), 2녀 양세기(楊世基: 南原人, 進士)에게 출가하다.
공은 미능재공의 증손이요, 성만공의 손자이며 오주공의 4자로 인조 24년(1646) 9월 18일 출생하여 명재 윤증(明齋 尹拯)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에 밝았다. 숙종 24년(1698) 천유일(薦遺逸)로 교관(敎官)에 제수되고 뒤에 사헌부 지평(持平: 正5品)을 내렸으나 모두 받지 아니 하였 으며 영조 5년(1729) 승계(陞階)하여 첨추(僉樞)에 올랐다. 영조 6년(1730) 4월 7일 향년 85세로 졸하였으며 묘는 구례 잔수의 성만공묘 아래 임좌 (壬坐)로 있다. 유고(遺稿) 2권과 가의(家儀) 1권이 있다.
배위는 증 숙부인 파평윤씨로 참봉 윤숙거(尹叔擧)의 따님이고 재취 증 숙부인 장수황씨는 찰방 황숙구(黃叔龜)의 따님으로 3녀를 두었으며 삼취 증 숙 부인 흥덕장씨는 호군 장칙(張恜)의 따님으로 1남 1녀가 있다.
승지공 최준원(8世)은 성종 15년(1484) 서울에서 참의공의 손자이며 통례공의 1자로 태어나 어려서 양친을 따라 남원 외가집에 내려왔다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학업에 정진하여 약관 18세(1501)로 진사에 급제함으로써 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홀어머니를 크게 기쁘게 해 드렸는데 뛰어난 재주를 펴보 지도 못한채 대과(大科)를 앞두고 뜻밖에 급병을 얻어 중종 6년(1511) 5월 4일 28세에 세상를 떠나고 말았으니 통례공이 이어 또 한번 비통함을 금치못 하였다. 뒤에 승정원 좌승지(正3品)에 증직되었으며 배위는 증 숙부인 상주박씨로 문과급제하고 군기시정(軍器寺正)을지낸 박기수(朴期壽)의 따님이다. 묘는 전북 임실군 삼계면 탑전리 갈록동 해좌(渴鹿洞 亥坐)에 쌍봉이며 묘비가 서있다. 천행으로 연산 6년(1500)에 승지공이 17세에 얻은 독자가 삼계공 최언수 (崔彦粹)로서 통례공의 종통을 잇고 이후부터 자손들이 대대로 크게 현달하여 가문을 혁혁하게 빛내었다.
동계공 최응립(崔應立)의 字는 주극(柱極)이요, 호는 동계(東溪)이며 조선후기에 의병장이다. 영의정 최항(崔恒)선생의 9세손이요, 통례공 최수웅 (崔秀雄)의 7세손이며 남강공 최 옹(崔顒)의 증손이다. 소년시절부너 성품이 용맹하고 무예를 좋아하여 세칭 간성지재(干城之材)라 하였다. 1624년 갑자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왕이 몽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창의 모병하여 백함생(白咸生)과 함께 질마재에서 대첩한 공으로 조정에서 진무원종 공신일등(振武原從功臣一等)에 책훈되고 충좌위 선략장군 전부장(忠佐衛 宣略將軍 前副將)에 임명하였다. 그 후에 61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창의하여 의병 수천명을 모집하고 현감 백함생(白咸生)과 함께 강화도에 이르러 바로 적진에 뛰어들어가 많은 적을 무찌르고 분전하다가 순절하였으니 1842년 헌종8년에 정읍에 모충사(慕忠祠)에 배향하고 1852년 철종3년에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 左承旨兼 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고 을유년에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資憲大夫 戶曹判書兼 知義禁府事) 가증되었다. 묘는 정읍 옹동면 삼성리 대곡산 110번지 간좌에 유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