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의 숨결 > 남양,영동
먼 옛날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이었던 남양(南陽)은 중국(中國)의 산동반도와 해상거리로 가장 가까운 항 포구인 마산포와 남양만을 안고 있는 큰 고을로서 익주(益州) 당성(唐城) 융중(隆中)이라고도 하였다. 이와같은 지리적 여건과 군사 교통 행정등의 중요한 위치로서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 사겸 남양진 병마첨절제사 영(南陽都護府使 兼 南陽鎭兵馬僉節制使 營)을 설치하고 문무3품 당상관이 도호부사로 12개면 211방리를 통치하였다. 구보서문 고적(舊譜序文 古蹟)에 보면 “수원부에서 서(西)로 80리쯤 떨어진 구봉산(九鳳山)아래 칠곡(漆谷)에 와룡정(臥龍亭) 옛터가 있다. 율정공(栗汀公)이 광해군(光海君)에게 간해오다가 계축년(癸丑 1613) 폐모론에 불복항소하고 전원(田園)으로 돌아와 정자(亭子)를 지은 후 와룡정 (臥龍亭)으로 현판을 달고 형님인 행원공(杏園公)과 그 속에서 화락하게 읊조리고 노닐며 종노할 계책을 세웠으며 제현(諸賢)의 창수(唱酬)한 시(詩)가 많았는데도 지금은 폐허가 되어 창한(愴恨)을 금할 길이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봉산 줄기가 서해로 뻗어나간 서여제면(西如堤面) 칠곡동(漆谷洞) 지금은 화성시 송산면 칠곡리 서해에 면한 기름진 땅에 우리 삭녕최씨 사직공파선 조께서 남양 전장(田庄)으로 내려와 사시면서 그 후손들이 가훈을 충실히 계승하여 익히고 열심히 학문을 닦아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 영원군(寧原君)의 두 아드님 행원공 동립(杏園公 東立), 율정공 동식(栗汀公 東式)이 문과에 급제하고 현달하였으며 행원공의 세 아들 장자 월담공 호(月潭公 皥), 사마 공 환(司馬公 皖), 독송재 교(獨松齋 皦)가 각각 대과와 소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 현달하여 가문을 빛냈으며 율정공의 장자 위(蘤)는 음직으로 현령 (縣令)을 지내고, 2자 파(葩)와 3자 몽(曚)은 통덕랑으로 학문연구에 정진하였으나 아들 대에서는 종형제가 남양13년 (大年 萬年 延年 龜年 栢年 碩年 永年 益年 奎年 參年 斗年 昌年 聃年)으로 이름을 드날리어 많은 문무관과 효자열녀를 배출하고 자손이 번성하여 남양을 비롯하여 광주, 원주, 전의, 안성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율정공은 자는 정칙(正則)이고 호는 율정(栗汀)으로 영원군(寧原君)의 차자로 명종17년(1562)에 태어났다. 자라서 대사성 우성전(禹性傳)에게 수학하여 선조21년(1588)에 성균관 진사가 되고 선조27년(甲午) 정시(庭試)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 (學諭)에 제수되었다.
선조 29년(1596)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 사간원 헌납과 정언을 역임하고 선조 36년(1603) 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역임하였 는데 권세 있는 자의 미움을 받아 경성부(傾城府)판관으로 좌천되었다가 돌아와서 성균관 직강과 사예를 역임하였다.
선조40년(1607) 안변부사에 제수되어 나아가 제방을 쌓고 도랑을 파는 등 수리사업을 크게 일으켜서 수답(水畓)을 개발하여 쌀을 증산케 하여 백성 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였다.
광해군 4년(1612)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로 옮기었다. 광해군 5년(1613)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상 소를 올리고 사직하여 구봉산아래 칠곡향리로 돌아와 와룡정(臥龍亭)을 짓고 그 속에서 시(詩)를 창수하며 지냈다. 뒤에 여러 번 사간, 집의, 보덕으로 불렀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고 이듬해(1614) 6월 9일 향리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53세였다.
그 후 계해(1623)년에 인조(仁祖)가 반정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공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 정(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藝文官 直提學 尙瑞院 正)으로 추증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장령 하원(河源)의 따님으로 생 1남 1녀하니 아들은 위(蘤)로 사헌부감찰과 평강현령을 지냈으며 녀는 원주인 좌의정 원두표(左議政 元斗杓)에게 출가하였다.
계 배위 증숙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참봉 두병(斗柄)의 따님으로 생 2남 2녀하니 아들은 파(葩)와 몽(曚)이며 녀는 판서 함능군(判書 咸陵君) 이해 (李澥)와 현감(縣監) 이상절(李尙節)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남양 서신면 전곡리 진좌(辰坐)에 있으며 묘하에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사마공의 자는 백야(白也)이며 행원공의 차자로 선조17년(1584)에 구봉산아래 남양 칠곡에서 출생하여 광해군 2년(1610)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벼슬할 뜻이 없어 정택뢰(鄭澤雷)와 더불어 연명항소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생동안 시서(詩書)를 벗삼아 학문연구와 자손훈육에 노력하고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인조23년(1645) 2월 8일에 춘추62세에 졸하였다.
배위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첨지 훤(僉知 萱)의 따님으로 생 1녀하시니 우윤 이세성(右尹 李世晟)에게 출가하였고 계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양녕 대군의 후손인 설(渫)의 따님으로 무육하여 종제 평강현령 위(平康縣令 蘤)의 차자 석년(碩年)으로 후사를 삼았다.
묘는 남양 칠곡리 포지동 간좌(艮坐)에 있으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상석과 향로석과 망주석만 있다.
독송재공의 자는 교여(皦如)이고 호는 독송재(獨松齋)이며 행원공의 3자로 태어났으나 생졸년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음직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배위 영인 덕수이씨(令人 德水李氏)는 군수 안직(安直)의 따님으로 생 4남 3녀 하시니 장남 대년(大年)은 참봉이고 2남 만년(萬年)은 백부 월담공에게 출계하고 3자 연년(延年)은 생원이며 4자 구년(龜年)은 사인이다. 장녀는 도사 김석(都事 金碩)에게 차녀는 동래인 정우상(東萊人 鄭羽祥)에게 3녀는 기계인 유명관(杞溪人 兪命觀)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남양 칠곡리 모지동 오좌(午坐)이다.
현령공의 자는 백영(伯英)이며 율정공의 장자로 선조22년(1589)에 출생하여 음직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평강 현령(平康縣令)을 지내고 효종8년(1657) 10월 3일에 졸하니 향년이 69세였다. 배위 문화유씨(文化柳氏)는 희분(希奮)의 따님으로 생 7남 2녀하시니 장남 백년(栢年)은 사마시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내고, 2자 석년(碩年)은 당숙인 사마공 환(皖)에게 출계하여 통천군수를 지내고 사헌부 집의로 증직되었으며 3자 영년(永年)은 성균생원으로 통정대부에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되었으며 4자 익년(翼年)은 사마이고 5자 규년(奎年)은 어모장군을 지냈으며 6자 삼년(參年) 무후하고 7자 두년(斗年)은 만호(萬戶)를 지냈다. 장녀는 허설(許卨)에게 차녀는 최구(崔球)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남양 서신면 전곡리 고(考)묘 우측 진좌(辰坐)이다.
자봉공의 자는 문길(文吉)이고 호는 자봉(紫峯)이며 행원공의 5대손으로 증 이조참판 경수(慶壽)의 4형제중 셋째 아들로 숙종9년(1683)에 출생하여 숙종31년(1705) 문과에 급제하여 사옹원 직장에 제수되고 예조, 병조의 좌랑을 거쳐 시강원사서로 천거되고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종부시정으로 왕실족보를 교정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상예원 판결사에 임명되고 형조참의를 거쳐 승정원부승지를 지내는 등 양사를 거쳐 경주 부윤등 웅부요읍(雄府要邑) 여섯고을의 수령으로 가는 곳마다 애민하고 선정을 베푼 공으로 벼슬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으나 청렴결백하여 궁핍한 생활에 만족하면서 태연하게 음영(吟詠)을 즐겼다.
영조13년(1737) 2월 6일 졸하니 춘추 55세였다.
배위 정부인 진주 유씨(晋州柳氏)는 진사서장(進士瑞章)의 따님으로 딸만 둘을 낳아 종형 종운(宗運)의 차자 태형(台衡)을 후사로 하여 가계를 이으고 딸은 해주인 정운기(海州人 鄭運紀)와 안동인 권세식(權世栻)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남양 송림리 임좌(壬坐)에 있으며 자봉집 5권을 남겼다.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상형공의 자는 자시(子是)이고 증 좌승지 종은(宗殷)의 장남으로 숙종27년(1710) 2월 11일 진시에 태어나시었는데 어려서부터 태도가 의연하고 기도가 단중하고 용력(勇力)이 절윤하였다.
영조5년(1629) 풍릉부원군 조문명(趙文命)의 천거에 의하여 훈련원 초관과 선전관이 되었다가 11월에 식년과 전시(式年科 殿試)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도사 겸 종사관이 되었다가 경력(經歷)으로 올랐다
영조13년(1737) 박천군수(博川郡守)로 나갔다가 와서 영조15년(1739)에 승진하여 훈련원정에 서임되고 대구영장으로 나갔다 돌아와서 내금위장 (內禁衛將: 從二品)에 제수되었다.
은성부사(隱城府使)와 이천부사(伊川府使)와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역임하고 영조26년(1750) 장단부사 겸 방어사(長端府使兼 防禦使)로 제수되었다. 영조27년(1751) 3월 12일 승진하여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이해에 어머니 백천조씨(白川趙氏)가 돌아가시어 남양초로(南陽草蘆)에서 상주노릇을 하시다가 계유년(1753) 2월5일에 졸하니 춘추53세였다.
배위 정부인 무송윤씨(茂松尹氏)는 사인 우신(遇莘)의 따님으로 생 2남 2녀하시니 장자 성교(成敎)와 차자 명교(名敎)이며, 딸은 전주인 이래(全州人 李萊)와 광주인 이상리(廣州人 李尙履)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남양부 음덕면 은암후산 간좌(艮坐)에 있다.
승지공 태형의 자는 계정(季靖)으로 숙종44년(1718)에 종운(宗運)의 3형제중 둘째아들로 태어나서 당숙인 부윤공 종주(府尹公 宗周)에게 출계하여 영조19년(1743)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정자에 제수되고 개령현감으로 나갔다 돌아와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장령, 헌납을 역임하고 사간 원 사간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로 옮기었다.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특지로 승지에 오르고 강계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승정원 우승지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承政院 右承旨兼 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을 역임하였다.
정조7년(1783) 8월 29일에 졸하니 향년 66세였다.
배위 숙부인 전주이씨는 양평군 색(陽平君 穡)의 따님으로 생 2녀하니 의령인 남인로(宜寧人 南寅老)와 전주인 이한덕(全州人 李漢德)에게 출가하고 계배위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선릉참봉 신상(宣陵參奉 藎相)의 따님으로 공이 돌아가실 때 자진하여 종부하세 하시매 열녀정려가 내려서 공의 묘좌하 에 열녀정문이 있다.
열녀 남양홍씨는 조선왕조(숙종44년(1718)~정조7년(1783))에서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던 삭녕인 최태형(崔台衡)의 처이며 조선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경헌공 홍섬의 5세손인 선릉참봉 홍신상의 따님이다.
부군 최공의 병이 위독하자 불원천리 구약하여 주야간병하며 북진기천하고 기우사당하며 단지주혈하였으나 명운을 어찌하리요 급기야 부군이 세상을 떠나니 종부하세를 결심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하다가 자결하니 수가 47세였다.
부군과 동혈합장하니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겨 정조11년(1787) 열녀정려의 명정이 내려져서 1788년 묘하에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1925년 5월에 중창을 하고 2001년 3월 30일자로 화성시 문화유적 제12호로 지정되어 낡은 정문을 헐고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정문을 개축하고 담장을 쌓고 대문을 새로 세우고 단청을 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다.
정문안에 열녀 승정원 우승지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최태형 처숙부인 남양홍시지문(烈女 承政院 右承旨兼 經筵 參贊官 春秋館 修撰官 崔台衡 妻 淑夫人 南陽 洪氏之門 上之 十一年 十月 日 命旌閭)라고 새겨진 사액현판이 걸려있다.
위치는 화성시 남양동 송림리 산125번지에 있다.
희천공(熙川公) 휘 사온(士溫)께서는 낭장공파 3세조 전서공(典書公) 휘 윤문(潤文)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어 희천군수(熙川郡守)에 부임하시 어 청정덕치로 민풍귀후하고 범사에 완급취습하여 명관선정하여 애민하였으며, 희천공파의 파조가 되시었다.
아드님이신 5세조 휘 헌(巘)은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치민봉공하고 6세조 휘 태정(台挺)은 재예겸전하여 능통사문하고, 7세조 휘 수종(秀宗)은 현감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8세조 휘 철견(鐵堅)은 상원군수를 역임하고 사재당 안처순(思齋堂 安處順)과 교우한 문장으로 용성지(龍城誌)에 재록하고, 9세조 휘 빈(斌)은 진사로 박학성효하고, 10세조 휘 대효(大孝)는 진사로 시문정통하고. 11세조 휘 부(溥)는 학덕고명하고, 12세조 휘 진민(進敏)은 봉선지효하고, 13세조 휘 승달(承達)은 경독안분하고, 14세조 휘 이지(以之)는 효친효공하다 위 11선대공은 재관에 이덕치민하고 재가에 이효사친하며 세덕훈업의 가성이 연계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세대가 구원하고 많은 병화로 후손이 산거하여 봉영을 실전하여 희천공파 종중회장 병근(炳根)과 총무 덕행(德行)이 주선하고 많은 후손들이 협찬하여 경오(1990)년에 충북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외삼정에 희천공파 세덕단을 설단봉안하였으며, 매년 음력10월 첫째 일요일날 시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