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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 항 태허정
글쓴이 : 최성식 날짜 : 2017.12.11 13:02:17 조회 : 4882 추천 : 376 글쓴이IP : 122.45.1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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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崔恒]태허정(太虛亭)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정보(貞父), 호는 태허정·동량(梁). 시호 문정(文靖)
 
 최충(崔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윤문(崔潤文)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최사유(崔士柔) 어머니는 오섭충(吳燮忠)의 딸이다. 서거정(徐居正)의 자부(姉夫)이다.
시대 조선 출생 -1409년(태종 9) ~타계 1474년(성종)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성별 남    본관 삭녕(朔寧) 대표관직(경력)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관련사건 계유정난
최항은 성균관 시절,
 
늘 대성전 잣나무 밑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공부에 대한 압박과 갖가지 차별속에서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항이 참을 수 없었던 차별대우가 있었다.
사량생은 특별 과거시험을 볼 수 없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항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사량생들도 특별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어낸다.
그리고 1434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세종이 대성전에서 문묘를 올린 뒤특별 과거시험인 알성시를 연 것이다.
최항은 이날의 시험에서도 관리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사량생 최항이 이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것이다.
비웃음을 사던 기부입학생에서 장원급제의 주인공이 된 최 항.
어우야담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과거시험 전날 세종은 용이 성균관 잣나무를 감고 있는 꿈을꾼다.
잠을 깨 살펴보니 최항이 그곳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성균관 잣나무에는 장원급제 나무라는의미의 ‘장원백’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과거 시험이 치러질 무렵이면, 성균관 유생들은 이 잣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자리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장원급제 후, 최항은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집현전에 들어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창제에 공을 세우고,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467년, 최항은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1459년, 최항이 성균관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더 이상 구박을 받던 사량생이 아니었다.
성균관의 대사성, 지금의 대학총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그야말로 화려한 금의환향이었다.
성균관 유생의 놀림을 받던 미운 오리새끼에서 대학총장이 되어 돌아온  최항. 성규관 유생들에게 최항은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는
희망을 보여준 성균관 최고의 스타였다
http://www.k-heritage.tv
태허정 최항 선생과 잣나무
광해군때 어우당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종 16년 세종은 어느 날 용상에서 잠시 낮잠을 자다가 큰 용이 성균과 서편의 잣나무에 서리어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깨어 하도 이상해 도승지에게 살펴보고 오라 했다.
도승지가 성균관에 가서 보니 한 이름모를 선비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잣나무 밑에서 자고 있었다.
그 다음날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한 사람을 보니 바로 그 선비였다.
그가 훗날 명신이요 대학자가 된 태허정 최항이었다.
그 이후 그 나무를 장원백이라 하였다한다.
저서(작품)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 『고려사』의 개찬(改撰), 『동국정운』·『경국대전』·『동국통감』 태허정집, 관음현상기
 
등의 찬수, 세종부터 예종까지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당시의 문호였다.
태허정집[太虛亭集]
최항의 아들 최영린(崔永潾)·최영호(崔永灝)가 자료를 수집하다가 죽자, 처남인 서거정(徐居正)이 이를 이어 1486년(성종 17) 편집을 끝내고 간행하였다.
그 뒤 1569년(선조 2) 증손 최흥원(崔興源)이 경상도도사로 있으면서 경상우도수영(慶尙右道水營)에서 중간하였다.
그러나 그 중간본이 잘못된 곳이 많아 7대손 최온(崔?)이 1625년(인조 3)에 필삭(筆削)·증손(增損)을 가해 다시 간행하였다.
1707년(숙종 33) 8대손 최정현(崔鼎鉉)과 9대손 최시옹(崔是翁) 등이 이를 다시 중간하였다. 권두에 서거정의 서문, 권말에 최흥원의 구간기사(舊刊記事), 최온의 간기(刊記), 최시옹의 발문이 각각 있다.
이 책은 일반적인 문집 체계와는 달리 맨 앞에 저자의 묘비명과 묘지문이 있고, 이어 권1에 시 218수, 권2에 서(序) 12편, 기(記) 5편, 발(跋) 3편, 서(書) 1편, 표(表) 7편, 전(箋) 13편, 소(疏) 5편, 제문 3편,
 찬(贊) 12편, 비명(碑銘) 2편, 보유(補遺)로 계몽요해발(啓蒙要解跋)·사예부군행적(司藝府君行蹟)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에는 일본의 국사(國師)나 승려를 상대로 한 것이 많다. 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신숙주(申叔舟)를 증별(贈別)한 것도 있다. 문(文)은 대개 왕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특히 조선 초기 명(明)과의 관계를 살피는 데 참고가 되는 글들이 많다.
 그 가운데 「어제유장설서(御製諭將說序)」와 「명황계감서(明皇誡鑑序)」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의 입장에서 왕과 장수가 지켜야 할 것들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기의 「기영회기(耆英會記)」는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자로서 70세가 넘은 기로(耆老)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자리에서 성종이 불교정책과 혼인제도에 있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풍속에 대해 시정책을 물은 데 답한 글이다.
「십이준도찬(十二駿圖贊)」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껴 기르던 12마리의 준마(駿馬)에 대해 지은 글이다. 서(序)와 함께 그 문세가 웅건하고 발랄해 흥미를 끈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이 해『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어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박팽년·신숙주·이개(李塏)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445년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훈민정음해례』 등을 찬진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5등으로 급제,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세종은 세자(뒤의 문종)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했는데 이 때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정치에 보좌함이 컸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와일본의 사신을 접대했고, 같은 해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해 7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석하는 일을 맡았으며, 『고려사』의 열전을 집필하였다. 1452년 2월『세종실록』 편찬 때는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협찬한 공이 있다 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가 되었다. 이 해 12월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454년 10월에는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章)을 지어 올렸으며, 1455년 정난공신 1등의 교서가 내려졌다.
그 해 2월 대사헌이 되고, 6월에 세조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7월에 서연의 우부빈객이 되었고, 그 뒤 호조참판·이조참판·형조판서·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세조는 즉위한 직후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 그는 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 등과 함께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으로 임명되었고,
1458년(세조 4)에 『신육전(新六典)』의 초안을 작성하여 올렸다.그 해 부친상을 당했으나 왕명으로 기복(起復)되어 다음 해 중추원사세자빈객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46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1년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 간행하였다.
1463년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464년 9월 왕명으로 『병장설주(兵將說註)』를 산정(刪定)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겸 세자이사(左參贊兼世子貳師)가 되었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였다.
1466년에 판병조사로 임명되자 그는 군사 관계는 적임이 아니라며 간절히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67년 4월 좌찬성, 5월 우의정, 7월 좌의정, 9월 영의정이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9월신숙주·한명회(韓明澮)·김국광 등과 함께 원상이 되었다. 1469년 경국대전상정소 제조(提調)를 겸하여 『경국대전』을 찬진했고,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하였다.
1470년(성종 1) 부원군에 봉해졌고, 『역대제왕후비명감(歷代帝王后妃明鑑)』을 찬진하였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녹훈되고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연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세종실록』·『예종실록』을 찬진하였다. 그 뒤 1474년 4월에 작고했다.
그는 18년 동안 집현전관원으로 있으면서 경연관·지제교(知製敎)로서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례·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고제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서거정이 찬한 비명,
『필원잡기(筆苑雜記)』, 김육(金堉)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의 것과 『성종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그의 성품이 겸공(謙恭)·간정(簡靜)·단개(端介)·무화(無華)·공정(公正)하고 정관(正冠: 의관을 바로함.)·위좌(危坐: 무릎을 꿇고 몸을 바르게 하여 앉음.)하며, 침착 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청백하여 재산을 탐하지 않으며, 40년 간 벼슬했으나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겸근과언(謙謹寡言: 겸손하고 삼가며 말이 적음.)과 정관·위좌하였다고 한 것은 거의 비슷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성이 없고,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인사(人事)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문형(文衡)에 있던 사람이 의정으로 임명되면 반드시 문형직을 사양하는 것이 예였는데 그는 오히려 사양하지 않고 겸했다고 못마땅하게 평하고 있다.
선생은 조선 초기 훈구파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의 정비에 큰 역할을 했고 역사와 언어학에 정통했다.
대문장가요 오대제왕을 모신 명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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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제목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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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 숭덕대제 안내    대종회2018.10.01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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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 re: 대동보 수정분 재 발송 요청    진돌2018.08.173411 
593 이번에 편찬되는 대동보 구입은?    최광희2018.07.275295 
592 re: 이번에 편찬되는 대동보 구입은?    진돌2018.08.02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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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 족보등재    최극범2018.06.116981 
589 re: 족보등재    대종회2018.06.123458 
588 숭인대제 및 선조묘역 답사    대종회2018.05.046686 
587 숭인대제안내    대종회2018.04.114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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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 re: 족보    진돌2018.04.03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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